참고사항. 주제에 대한 내용보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담겨있습니다 :)
최근 정희진의 공부라는 팟캐스트를 듣게 되었다. 이것을 알게 된 계기가 참으로 신기하다.
어느 날 그냥 갑자기 예전에 읽었던 배동근 선생님께서 번역한 [고래가 가는 곳]이라는 책과 비슷한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마구잡이로 책을 찾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배동근 선생님이 또 새로운 책을 번역한 것이 있나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다. 그런데 웬걸 [인덱스]라는 책과 [해파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새롭게 번역하신 책이 있는 것이었다.
그냥 단순히 느낌에 비슷한 책을 또 하셨을까 싶어 찾아보았던 건데 교양 과학 책이 하나 더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주문 목록에 추가했다. 인덱스라는 책은 뭐랄까, 직접 번역하기를 선택한 것 마냥 굉장히 선생님 답다는 생각이 든 책이었는데 이후에 방송에서 각 책을 번역하게 된 계기를 듣고 나니 더 신기했다. 역시 사람은 관심 있는 것,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이 나를 따라오는 것 같다. 그리고 번역이 진행 중인 다른 책이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이것들도 해파리 책을 다 읽고 나서 차차 읽어 볼 생각이다.
이렇게 책을 주문하고서 오랜만에 카페에 들어갔는데 가입인사에서 정희진님의 팟캐스트를 듣고 찾아왔다는 사람이 있었다. 이건 또 뭔가 싶어서 찾아봤다. 선생님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어볼 기횐가 싶어서(이렇게 보니 너무 스토커 같다^^) 7일 무료 이용권을 사용할 수 있길래 한 번 들어봤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는 정말 10년 전 그때와 변함이 없었다. 선생님의 표정까지 상상되는 그런 목소리였달까. 처음에 회사 점심시간에 틀어 듣는데 왜인지 반가운 마음 때문인지 괜히 울컥해져서 듣다가 중단했다(전혀 슬픈 사연 같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러고 나서 다시 퇴근길에 이어 들었다.
정희진 작가님께서 선생님의 번역 실력을 칭찬하실 때 선생님께선 여전히 겸손하게 대답하셨지만.. 나 또한 선생님의 번역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공감하며 같이 들었다. 나는 더 훌륭한 번역가들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겐 선생님이 최고의 번역가이다.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선생님을 좋아하게 된 시점은 선생님의 수업을 처음 듣던 그날이었다. 거의 한눈에 반한 첫사랑처럼,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반해버렸다. 아 이 사람이다 싶었다. 이때는 재수학원의 정규반이 정해지지도 않았던 시점이었는데 이 순간 내 유일한 소망은 정규반으로 변경된 후에도 선생님이 우리 반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소망대로 이후에도 선생님의 수업을 계속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방송에서 이야기한 선생님의 학창 시절처럼 나 또한 입시를 위한 영어 공부에 이미 질릴 대로 질린 후였다. 사립초를 나왔어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영어 수업을 듣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초등학교 친구들은 이미 어릴 적부터 영어학원은 기본으로 다니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서야 처음 영어학원을 등록한 나는 그 친구들 사이에선 굉장히 늦은 편이었다. 이때 처음 다녔던 영어학원은 한 2개월? 정도 다니고 결국 그만두었다. 당시 은행사거리에서 유명했던 토*아라는 학원이었는데 분반 시험을 보고 반이 배정되었다. 분명 나는 대부분의 문항을 모두 찍어서 제출했는데 대충 중간 아래쪽 정도되는 반이 배정되었다. 이것도 영 결과가 이상하지만 아무튼 그 이후는 더 충격적이다.
나는 독해로 사용하는 책의 내용과 리스닝 수업에서 진행하는 듣기 문항을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해석 과제가 있지만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니었다. -- 아직도 처음 해석한 내용의 주제가 호주의 아웃백 사막에 대한 내용이란 것이 기억에 남는다 -- 과연 다른 사람들은 엄마와 아빠가 같이 총동원해서 학원 과제로 나온 영어 글을 해석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과제를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누구를 위한 과제인지 모를 과제를 해나가다가 어느 날 또다시 시험이 있었다. 그 시험의 결과는 더욱 기가 막혔다. 이번 시험 역시 내겐 너무 어려웠다. 이 시험을 보고 학원을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담당 선생님과 엄마가 상담을 하더니 내가 같은 레벨의 수업을 듣는 사람들 중에 시험 성적이 순위권(순위가 꽤 높았다)에 있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순간 그만둬야겠다는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과연 나와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은 수업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을까?
그 학원에서의 일이 꽤나 충격적이었어서 한 1년간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그 이후에는 여러 학원에 가서 시험도 보고 공부도 해봤다. 그 과정에서 꽤 괜찮은 학원도 있었다. 그나마 다녀본 곳 중에 꽤 인간적인(이라는 표현은 좀 이상하긴 하지만) 곳이었다. 학원 대표의 가치관이나 운영 방침이 꽤 마음에 들었고 선생님들도 괜찮은 편이었다. 아무튼 그럼에도 나는 시험을 보는데 필요한 문법과 스킬을 공부한다는 것이 정말 너무너무 싫었다. 영어를 공부하는 방법이 진정 이것뿐인가. 하지만 그 와중에 나는 숙제도 굉장히 잘하고 단어암기도 매우 잘해서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렇다고 영어를 끝내주게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다 수능을 망쳐서 재수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별다른 기대를 하고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재수학원이 지금까지 다녀왔던 학원들 중에선 제일 좋았다. -- 이유를 간략하게 말하면 고등학교 때까지 나를 가르쳤던 모든 선생님들을 포함해서 가장 보석 같은 분들이 다 여기에 있었다. 선생님께선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오히려 재수학원 (일부) 선생님들이 더 학문의 근본적인 학습방법에 가까운 방식으로 가르쳤다. 다른 일반학원들은 (안 좋은 쪽으로) 더 하다는 뜻이다. 고등학생 때 이런 선생님들에게 배웠다면 재수학원을 안 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달까. -- (이과생임에도 불구하고) 그중에서도 배동근 선생님이 가장 좋았다. 내가 이과생이 아니었다면 정말 선생님 방식의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했을 것이다. 선생님이 하는 특강은 끝까지 들었다. 정말 웃기는 생각이지만 나는 수능 영어를 못 보더라도 선생님의 강의를 가능한 많이 듣고 싶었다. 아마도 평생 이런 강의는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그 학원에서 그렇게 오래 계셨는 줄은 방송을 듣고 처음 알았는데, 선생님의 수업 방식은 정말 독특했다. 심지어 그 수업을 하는 곳이 재수학원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능을 준비하는 재수생의 특강 수업에 수능 지문이 아닌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원서를 가지고 수업을 하는 선생님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물론 나는 그 덕에 굉장히 행복했다. -- 나는 아직도 선생님의 수업자료를 애지중지 잘 갖고 있다. 안타깝게도 제대로 다시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수업은 조금 쉽게 말하면 마니아 층이 있었다. 수능시험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선생님의 방식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선생님의 수업은 항상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수능 모의고사 시험을 보고 난 뒤였다. 굉장히 정답률이 낮은 어려운 빈칸추론 문제가 나왔다. 각 정규반은 세 명의 서로 다른 영어 선생님의 수업을 듣게 되는데 당연하게도 모든 선생님은 그 지문에 대한 정답 해설을 했다. 다른 두 명의 선생님께서도 수업에 들어오셔서 그 지문을 해설해 주셨는데 내가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들어도 해설이 좀 이상했다. 나와 함께 배동근 선생님의 수업을 좋아하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모두 그 설명에 의문이 가득했다. 심지어 다른 친구 두 명은 다른 영어 선생님들까지 찾아가며 설명을 듣고 왔다고 했는데 모두 똑같이 이상하다고 했다. 해석이 이상한 건 둘째치고 동일한 대명사가 아닌 것 같은데 같은 것으로 지칭했다.
그리고 우린 선생님의 차례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께서도 수업에 들어오자마자 그 지문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방송에서도 간략하게 언급하셨지만 선생님께서는 수능 지문에 대한 원문을 찾아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그 지문도 그랬던 것 같다. 그 어려웠던 빈칸 추론 지문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데 오 이해가 된다, 정도가 아니라 와 무조건 이거다 싶은 200%의 확신을 주는 해설이었다. 솔직히 그렇게 과장은 아닌데 그냥 단순한 문장 해석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선생님이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갔을 때 같이 들었던 친구들과 기립박수를 쳤으니까 말이다.
선생님께선 방송에서 약간의 허세를 위해 항상 책을 끼고 다니셨다고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선생님의 진정한 장점은 정말 책을 많이 봐서라고 생각했다. 수업 시간에 사용하는 여러 예문들은 선생님께서 읽었던 책에서 나온 경우도 많았고, 무엇보다 그래서 해석(한국어 표현)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이건 방송에서도 나온 이야기들이지만 좋은 번역은 모국어(한국어)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선생님이 하시는 해석은 내가 듣던 어떤 설명들 보다도 명확하고 깔끔했다. 그래서 고래가 가는 곳을 읽었을 때 역시 번역을 잘하셨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번역일을 시작하시면서 굉장히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놀라웠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선생님 덕에 영어 공부를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 영어 실력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분야에 있어서 그렇게까지 성실하게 영어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든 원한다면 영어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 나는 선생님처럼은 될 수 없겠구나 싶었던 부분이 있었다. 선생님의 독서량, 독서 방식뿐만 아니라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보시는 줄 몰랐는데.. 문화생활과 거리가 먼 나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부분이다. 이건 단순히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학습에서 얻어지는 표현들은 결코 따라갈 수 없다. 학원 다닐 적부터 느껴온 다른 선생님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은 아마도 이런 부분에서 큰 차이를 주지 않았을까.
고래가 가는 곳을 읽은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맞았다. 선생님께서 번역한 책이 있다는데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다음 책들은 조금 다르다. 고래가 가는 곳은 단지 선생님께서 번역해서가 아니라 정말 인상적으로 읽은 책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번역하신 책들은 '배동근 번역가'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선생님께 따라오는 필연적인 운이 좋은 책을 이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선생님께 인덱스라는 책과 해파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책이 온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도 번역가 배동근으로 좋은 책들을 많이 소개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과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번역을 맛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선생님 덕분에 번역가의 이름을 보고 책을 고르는 사람이 되었으니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
아, 이건 방송을 듣다가 무심코 든 생각인데.. 선생님 방송이랑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 뭐든 좋으니 방송 하나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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